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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ssertion

Pierre MOLINIER : 사드적 페티쉬즘


Pierre Molinier(1900-1976), L'éperon d'amour (1960)


피에르 몰리니에는 삶으로 알고 있었다. '페티쉬즘(물신주의)'로 집약되는 그의 인생은 매우 사드적이다. 기본적으로 '신경증'적인 것이, 즉 약간 이상한 것이 인간의 본래 모습이라면, 그의 이 페티시즘, 궁극으로 간듯한 이 페티쉬즘도 마찬가지로 '이상한 정상'이다. 

그가 '스타킹', '다리'에 집착했다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다. '집착했다'는 것이 중요하다. 몰리니에'만'이 느낀 것은, 그 다리에 '팔루스'가 있다는 것이다. 팔루스는 오랜 권력이다. 세상에 나오기 전에 느낀 희열과 공포의 근원이다. 여전히 검은스타킹을 신은 다리는 '팔루스'가 있다. 어머니는 거세 당하지 않았다. 팔루스는 존재한다. 판타지는 사진과 닮아 있다. 그래서 몰리니에는 하이힐을 신은 다리에 팔루스를 달지 않을 수 없다. 존재는 그곳에 있으므로, 나는 향유할 수 있다/향유한다. 

그러므로 나는 팔루스가 있는 어머니다. 








무정부주의자 예술가이자 자유로운 난봉꾼이었던 몰리니에
(Molinier, artiste anar et libre-bandeur) 

20세기 자유인이었던 피에르 몰리니에(Pierre Molinier)는 일생 쾌락을 추구했고, 무수한 정부를 거느렸다. 미풍양속을 깨뜨리며, 타인을 의식하지 않고 자신의 열정을 구현하기 위해 애썼던 인물이다. 노예가 되는 대신 이 모든 것을 추구한 것이다.

클로비스 트루이유(Clovis Trouille)의 절친한 친구이자 그와 함께 편의주의 및 청교도 도덕을 증오했던 몰리니에의 작품들은 현재 파리에서 1시간 떨어진 릴아당의 루이상렉 예술역사박물관에 걸려 있다. 전시회는 오는 3월 7일까지 열린다. ‘건달들, 점쟁이들, 관음증 환자들’이란 제목을 단 이 전시는 그림과 사진 등 그의 작품 일부를 소개하고 있다. 

규범에서 벗어났던 여장 남자, ‘육체예술’의 예고자, 퀴어 운동의 선구자이기도 했던 화가 겸 사진가의 초상을 10개 항목으로 정리했다.

1. 세 살 때부터 그는 여자들의 다리에 흥분을 느꼈다

무신론자였던 피에르 몰리니에는 1900년 어느 성(聖)금요일에 아겐에서 태어났다. 그날은 13일이자 금요일이었다. 아버지는 인조대리석과 인조나무를 전문으로 다루던 화가이자 장인(匠人)이었고, 어머니는 재단사였다. 몰리니에의 성생활은 아주 일찍부터 시작된다. 3세 때부터 그는 여성들의 다리에 관심을 가졌다. 10세 때에는 자기 누이의 다리를 포옹한 후 스타킹에 페티시즘을 느끼기 시작한다. 13세에 창녀와 처음 잠자리를 했고, 그 후 오랫동안 매음굴을 드나들었다. 15세에는 죽은 누이의 몸 위에 자위하며, 그녀처럼 아이돌이 되기로 결심한다. “죽은 후에도 누이의 모습은 아주 아름다웠다! 나는 그녀의 배, 다리, 옷에다 정액을 뿌려댔다. 그녀는 내가 줄 수 있는 최상의 것을 가지고 무덤으로 들어간 것이다.” 18세가 되자 그는 여성으로 변장한 후 서민들이 즐기는 무도회에 참석했다. 젊은 여성들을 유혹하기 위해서였다. 그는 그중 한 명을 임신시켰고, 그다음 차버린다. 여인은 모니크란 딸을 낳았는데, 몰리니에는 20년 후 보르도에서 딸과 해후하게 된다. 

2. 그는 성도착자가 된다

군 복무를 마친 1922~23년께 몰리니에는 보르도에 정착했고, 거기서 진부한 스타일로 풍경 그림과 초상화를 그리기 시작했다. 결혼 후 프랑수아즈와 자크라는 두 아이를 낳았지만 수많은 정부와 만남을 가졌다. 그의 아내는 절세미인으로, 질투심이 대단했다. 어쨌거나, 몰리니에가 자기 딸을 사랑하게 되면서 부부는 어려운 상황에 빠지게 된다. 1931년에 부부는 포세 거리 7번지로 이사했다. 그리고 1930년대 내내 몰리니에는 아내와 친구들의 잔소리를 피해 좁은 고미다락방 속에 틀어박혀 그림을 그렸다. 2차 세계대전이 끝나자 그는 이전의 삶을 완전히 청산하고 도발적인 그림에 달려든다. 1949년에는 아내가 그를 떠났고, 1950년대 초부터는 자신의 모습을 사진에 담기 시작했다. 낮은 천장 아래에 누워 그는 음탕하고 모호한 자세를 취했다. 그는 남자였지만, 동시에 여자이기를 원했다.

3. 양성적인 존재로 변신하다

1951년부터 1966년까지 몰리니에는 자신의 모습을 사진에 담았다. 음탕한 포즈를 취하고 있는 여장 남자, 꽉 끼는 허름한 기성복 속의 다리들, 오랑캐꽃으로 가린 얼굴 등이었다. 심지어 그는 전시용 마네킹과 함께 사진을 찍었다. 이 마네킹은 상상 속의 아내였다. “피에르 몰리니에는 여러 타입의 전시용 마네킹을 갖고 있었다. 그는 마네킹들과 추잡한 관계까지는 아닐지라도 사랑스러운 관계를 유지했다. 그는 인형의 머리, 가슴, 다리, 손 등 여러 조각을 수집한 후 자신이 원하는 대로 조합했다. 그런 의미에서 마네킹들이 아주 예술적이지는 않았다.”(아스타르테 출판사가 간행한 ‘마니악(Maniac)’ 제7호에 수록된 질 베르케(Gilles Berquet)의 글) 조립이 끝나면 그는 매일 아침 인형을 칠했고, 옷과 천을 입혔으며, 인형의 손톱을 만들고, 거기에 자신의 몸을 합쳤다. 사람의 몸이 어디서 시작되고, 합성수지로 만들어진 몸이 어디서 끝나는지 전혀 분간해낼 수 없을 정도였다.

4. 몰리니에가 앙드레 브르통을 만나다

피에르 몰리니에는 그 어떤 유파에도 소속되길 거부했기에 오히려 존경을 받았다. 1955년에 그는 당대 최고의 시인이자 예술가였던 앙드레 브르통(Andre Breton)에게 자신의 복제작품을 몇 개 보냈다. 브르통은 “굉장한 흥미를 느낀다”며 열렬한 찬사와 함께 1955년 4월 8일 몰리니에에게 처음 편지를 보낸다. 4월 16일 두 번째 편지에는 “작품들은 아름다운 동시에 추문으로 가득합니다”라고 적었으며, 5월 21일 세 번째 편지에는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당신의 작품들은 끊임없이 전율을 일으킵니다. 마술적인 힘이 어느 정도인지 보여주는군요. 나는 불타오르고 가슴을 찢는 듯한 당신의 분위기를 좋아합니다.” 

몰리니에가 브르통을 완전히 정복한 것이다. 브르통은 1956년에 몰리니에의 사진들을 파리 소재 자신의 화랑인 ‘아 레투알 셀레’에서 성공적으로 전시하며, 그를 유명하게 만들었다. 하지만 몰리니에는 일생 동안 초현실주의자들에 동화되기를 거부했다. 초현실주의자들이 섹슈얼리티 영역에서 보여주는 청교도주의와 불관용을 받아들일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5. 족쇄 풀린 쾌락에 대한 강박

아첨에 무감각했던 피에르 몰리니에는 일생 동안 보르도에 칩거하게 된다. 채찍과 인형, 무기, 붓과 콘돔들이 빼곡히 들어찬 아파트에서 나오지 않았다. 아파트는 아틀리에인 동시에 온갖 의미의 ‘난잡한 장소’로 사용됐다. 바로 그곳에서 몰리니에는 페티시와 관련된 쾌락에 대해 거의 강박적인 취미를 느끼며 작품을 만들었다.

그의 모든 작품, 즉 정액으로 얼룩진 그림들과 내밀한 그의 사진들은 관습에 던진 도전장을 의미했다. 몰리니에는 ‘편협한 신앙의 소유자’를 좋아하지 않았고, 속물들을 더욱 싫어했다. 그는 자신의 방에서 방문객들을 맞았는데, 대부분은 여성들이었다. 때때로 몰리니에는 그들 앞에서 자신의 성적 환상에 대해 얘기해주며 수음을 하기도 했다. 우댕(Oudin) 화랑에서 판매하는 DVD를 통해 그의 목소리를 접하는 것이 가능하다. 몰리니에는 자신의 쾌락에 대해 노골적이고도 원색적으로 말한다.

6. “나는 방에서 살고, 잠자며, 즐기기로 결심했다.” 

“15세 나이였을 때 나는 신부가 되기를 원했다. 나보다 한 살 더 많았던 누이가 숨을 거두었다. 나는 혼자서 그녀의 임종을 밤새 지켰다. 나는 침대 위에서 시신을 포옹했다. 자기 여동생의 다리와 사랑에 빠진 한 인물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는 작품 ‘배덕자(背德者)들’을 나는 사랑했다. 완전히 내 경우와 똑같았다. 그녀가 죽은 이후 나는 오늘날 내가 살아가는 방식대로 살아가기로 결심했다. 방 속에서… 그렇지… 방 속에서…. 이 방으로부터 거의 외출하지 않고서 말이다. 잠자고 또 쾌락을 즐기면서. 그리고 그림을 그리면서. 펌프질을 할 수 있도록 해주는 도구도 만들었다.”(NRF 갈리마르 출판사가 펴낸 피에르 부르자드(Pierre Bourgeade)의 저서 ‘북극광’에 등장) 

1960년대 초에 몰리니에는 멍에를 하나 제작했다. 그걸 이용하면 마치 곡예사처럼 머리를 다리 속에 끼운 후 자신의 음경을 입 속에 집어넣는 것이 가능했다. “이걸 개발하는 데 2년이 걸렸다. 나의 정액 외에는 아무 것도 마시지 않으면서 마치 요기들처럼 나는 18일을 보냈다”고 그는 고백했다. 몰리니에는 입 속에 자신의 남근을 넣은 모습을 사진에 담았고, 그런 다음 이 사진을 마치 초대장처럼 자신의 친구들에게 발송했다. 

7. 산더미 같은 페티시들을 모으다. 

1973년 2월에 처음으로 몰리니에를 방문했던 피에르 부르자드는 다음과 같은 글을 남겼다. “몰리니에는 보르도 구시가지에 위치한 낡고도 먼지가 들끓는 한 호텔 내의 부엌 달린 2개 방에서 살았다. 두 번째 방에서 몰리니에는 작업하고, 식사했으며, 잠자고, 그림 그리고, 사진을 찍었다. 또 사진을 현상하거나 확대하고, 목공일을 하거나, 주조하는 작업을 했다. 케케묵은 문을 열자마자 바로 들어갈 수 있었던 첫 번째 방 속에 몰리니에는 쓰레기더미를 30년 전부터 쌓아놓고 있었다. 1973년 2월을 기준으로 삼더라도 쓰레기더미의 무게는 족히 수톤이 넘는다. 매일 분량이 늘어나고 있는 더미의 꼭대기에는 검은 나무십자가가 꽂혀 있었는데, 십자가에는 ‘피에르 몰리니에, 1900-19-’라는 구절이 새겨져 있었다. 몰리니에는 적절한 때가 도래해 시간이 부족하다고 느낄 때까지 글을 쓰고, 홀로 쓰레기더미 위에서, 여자 구두를 신고 화장을 하고서 곤두선 머리카락에 오랑캐꽃을 꽂은 채 잠을 자며, 종국에는 머리에 총을 쏴 자살하려는 의도를 가지고 있었던 것 같다.”(NRF 갈리마르 출판사가 펴낸 피에르 부르자드의 저서 ‘북극광’) 

8. 쾌락을 맛보며 밤낮을 지새다. 

1966년부터 몰리니에는 수많은 젊은 남녀들을 집으로 끌어들였다. 나이는 대부분 20세부터 25세 사이였는데, 몰리니에는 그들을 분장시키거나 변장시킨 후 성적 일탈로 인도했다. 몰리니에의 가장 큰 기쁨은 스타킹과 하이힐의 쾌락 속으로 젊은이들을 입문시키는 것이었다. 몰리니에는 “스타킹을 신지 않은 여성은 나를 흥분시키지 않는다. 하지만 그녀가 스타킹, 그것도 검은색 스타킹을 착용하는 즉시 나는 극도로 흥분하기 시작한다. 나에게는 아주 아름다운 다리를 지닌 정부가 있는데, 밤에 그녀와 대여섯 차례 관계를 갖기도 했다”고 설명한다. 그와 절친한 여성들 중에는 비엔나 상황주의자의 일원이자 오스트리아 출신 미녀인 하넬 코에슈(Hanel Koech)와 태국 여성인 엠마누엘 아르상(Emmanuelle Arsan)도 들어있다. 대사였던 아르상의 남편은 소설 ‘엠마누엘’ 덕분에 유명해진 인물이다. 이 모든 남녀의 사진을 찍었던 몰리니에는 사진들을 잘라 조립한 후 기묘한 포옹을 하는 풍경을 만들어냈다. 뽐내는 가슴 위에 멋들어진 엉덩이를 올려놓았고, 또 마치 꽃다발처럼 무수한 다리를 가진 피조물들을 사진으로 만들어냈다. 

9. “나는 당신이 얼간이라고 생각한다오.” 

몰리니에는 모든 형태의 타협을 거부했다. 그는 오직 창작에만 몰두했고, 마지못한 경우에만 그림들을 팔았다. 때로는 자신의 작품을 되사기도 했다. 그와 가장 절친한 친구 중 한 사람이었던 장-피에르 부익수(Jean-Pierre Bouyxou)는 다음과 같이 이야기해준다. “재능보다는 돌출행동으로 인해 이름이 난 한 작가가 피에르 몰리니에 그림 사본을 보고 거의 미쳐버렸다. 그는 모든 방법을 통해 진본을 구입하려고 애썼다. 작가가 그렇게 탐내던 그림을 양도할 만한지 결정하기 전에 몰리니에는 작가의 작품들을 읽어보고 싶다고 그에게 알렸다. 소설들을 성실히 읽었으나 몰리니에는 작품들이 전혀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는 다음 내용의 간결한 답신을 보냈다. ‘당신 책들을 읽어본 후 당신이 얼간이라는 사실을 알았소. 내 작품들 중 하나가 얼간이 집에 있다는 사실을 안다면 내가 더없이 불쾌할 것 같소.’”(장-피에르 부익수의 저서 ‘펜트하우스(Penthouse)’, 1985년 3월) 

10. 자살을 통한 몰리니에의 최후 

몰리니에는 더 이상 쾌락을 즐길 수 없을 정도로 “나의 정액이 마치 물처럼 변하는 날” 자살하겠다고 선언했다. 1976년 3월 3일 그는 자살한다. 의사들이 그의 항문을 수술하고자 했기 때문이다. 전립선암이 원인이었다. 그는 입에 권총을 넣고서 방아쇠를 당겼다. 그는 상상 속의 죽음이 “편의주의와 인습적인 삶에 맞선 죽음”이라고 설명하면서 이미 세 차례에 걸쳐 자살 장면을 사진에 담은 바 있었다. 고양이들에게 먹이를 준 후 그는 마지막 도전을 감행한다. 자신의 ‘생식기가 30세가 난 한 불구 남성에게 이식되기를’ 기대하면서 그는 자신의 몸을 학계에 기증했다. 하지만 그의 소원은 실현되지 않았다. 아쉬운 일이다. 


글=아녜스 지아르(佛칼럼니스트), 번역=이상빈(문학박사ㆍ불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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