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A;ssertion

현실을 유지하는 방법 : <Eyes Wide Shut>



(c) Cine21.,Co

'나는 그것을 원한다'라는 것이 평범한 자기 모습이라면, '왜 나는 다른 것도 아니고 그것을 원하는가?'라는 질문을 던지는 것은 비현실적이면서도 꽤나 적절해 보인다. 하지만 다음 질문은 어떨까? '나는 왜 항상 무엇을 원하는가?' 

'욕망'이라는 단어는, '금욕'이라는 삶의 자세(혹은 질서의 명령) 때문에 그런지, 어딘지 모르게 외설적이고, '부적절한'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욕망'을 단순히 '무엇을 원하는 것 그 자체'로만 놓고본다면, 그리 낯설지도 않은 인간적인 모습이다. 사전적으로 보았을 때, '요구', '욕구', '욕망', '충동' 모두 비슷한 의미이지만, 정신분석학의 장에서는 각각의 의미를 담지하고 전부 다른 역할을 하는 개념들이다. 여기서 먹고 자고 싸는 것은 '욕구'라고 정의한다. 그런데 일반적으로 '성적 욕구'는 '욕구'라고 표현되지만, 사실 '성적 행위'에 대한 바람은 '욕망'과 '충동'에 가까운 개념이다. 

'욕망은 그 자체로는 존재하지만 대상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욕망은 결코 채워지지 않는다'. 가만히 생각해 보자. 나는 그것이 무척이나 갖고 싶었고, 그 사람과 사랑하고 싶었는데, 그런 것들이 이루어졌던 기억을 떠올려 보자. 그런데, 그 순간, 그것에 대한 욕심이 사라지는 것, 그리고 그 후에 느껴지는 허탈감과 대상을 바꿔 다시 떠오르는 욕망을 경험해보지 못했는가? 

인간은 그 욕망의 진정한 대상의 '기억', '흔적'을 안고 사는 존재다. 그것이 무엇인지는 사실 모른다. 단지 그것이 분명히 있기는 있는데, 나한테는 없는 것(결여)일 뿐이다. 의식차원에서 알 수 없는 것을 무의식은 알고 있다. 하지만 무의식이기에 결코 그것이 무엇인지 '분명히 가르쳐 주지는 않는다'. 무의식이 말하는 것(증상)은 항상 왜곡되어 있다. 그래서 대상은 항상 바뀌며, 대상을 충족시키더라도, 욕망은 결코 채워지지 않는다. 

그런데 이 욕망은 꽤나 위험한 것이다. 일반적인 통념대로, (결국 패가망신하므로) 욕망을 따르는 삶이 위험하다는 것은 아니다. '누구나 욕망을 따르며 살고 있으므로, 누구나 욕망때문에, 욕망으로 인해 살아가고 있으므로'. 중요한 것은 이러한 욕망이 '실현되는 곳'은 일정한 '질서 내에서'라는 것이다. 영화의 주인공인 '윌리엄(빌)'과 '앨리스'는 '부부' 사이이다. 한 명의 배우자를 만나 무슨짓을 하던지간에 사회는 상관하지 않지만, '배우자가 아닌 사람'과 성적인 관계를 갖는 것을 사회는 처벌한다. '윌리엄'이 외도에 대한 생각이 '애초부터 없었고', 앨리스가 자신의 꿈을 숨기고(결국 대마 흡연 중에 다 털어놓지만), 자신의 욕망이 드러난 꿈을 '무섭다'고 말하고, 윌리엄이 결국 침대의 자신의 자리에 놓여있는 가면을 보고서 울음을 터뜨리는 것은, 이러한 사회적 질서의 체현, 그리고 그것의 현현에 다름 아니다. 이처럼 사회 내에서 개인의 욕망은 '일정한 수준'에서 제한되는데, 프로이트는 그것을 '쾌락 원칙'이라고 불렀더랬다. 

욕망은 꽤나 위험하다고 했지만, 쾌락 원칙 내에서의 욕망은 위험하지 않다. 위험할리가 없다. '위험하다'라는 말이 '사회의 틀, 질서를 벗어나 있다(그래서 '(처)벌'이 내려올지도 모른다)'라는 외재하는 평가라면 말이다. 문제는, 인간의 '충동'이 결코 이러한 '쾌락 원칙'을 따르지 않는다는 것이다. 

'앨리스'가 꾼 꿈에서 우리가 중시해야 할 것은 결코 그 '해군 장교'가 누구인가가 아니다. '남편과 아이마저 모든 것을 버리고 한 남자를 따라가려는 충동'이 그 꿈의 주인공이다. 앨리스의 꿈은 일반적인 꿈과 달리 굉장히 분명하게 앨리스의 욕망, 충동을 제시하고 있다. '욕망은 결코 길들여지지 않는다'. 영원히 채워지지 않는 결여가 일정한 한도 내에서 만족된다는 것은 어불성설이기 때문이다. 인간의 욕망, 충동은 이러한 틀을 '깨고 어딘가로 나아가기 위해 항상 준비하고 있다.' 그리고 그러한 대상을 만났을 때, 그 충동은 촉발된다. 인간의 욕망이 '위험하다'라고 하는 말은 바로 여기에 기초하는 것이다. 

앨리스의 꿈이 '충동'으로 요약된다면, 윌리엄의 그 경험들은 일종의 '호기심'이라는 키워드로 요약된다. 앨리스의 꿈 이야기를 듣고 윌리엄은 그 이야기에 분노하고, 앨리스에게 애증을 갖지만, 그와 동시에 앨리스가 느낀 그 '충동'을 '궁금해 한다'. 앨리스에 대한 분노는 '도미노'라는 거리의 창녀의 집까지 갔던 것으로 해결되었다고 치면, '충동'에 대한 궁금증은 무엇으로 풀렸을까? (더하여, 도미노의 집을 나서고 난 후 양아치들한테 '게이'라고 놀림받으면서 느꼈던 모멸감은 어떻게 풀렸을까?) 

바로 '의학 공부를 하다가 중간에 그만두고 삼류 피아니스트가 된(그래서 사실 사회적으로 죽은) 친구 닉'을 만나는 것이다. '닉'이 있는 지점은, 정확히 앨리스가 남편과 아이를 '버리고 떠난 후의 그 어딘가'에 있는 사람이다. 결국 닉을 통해 '음란 사교 모임'에 '불법적으로 참석'하게 된다. 

이 모임에는 '가면'이라는 중요한 지참물이 있다. 사람이 자신의 욕망을 '질서에 길들이는 것'은, 사회 속에서 자신이 일정한 '모습을 갖기 위해서'이다. (그것을 어려운 용어로 말하면 '호명(call)'이라고 한다) 사회 내에서 일정한 '이름'이 있다는 것은, 곧 내가 사회에서 '살아가고 있는 사람'임을 의미한다(그래서 윌리엄의 친구의 이름이 Nick(가명, 별명이라는 뜻)이다). '가면'은 이름을 가린다. '얼굴'도 하나의 이름임을 인정한다면 말이다. 그렇게 된다면 '충동'에 대한 의식적인 따름, 복종은 '가능해진다'. 위험하지 않기 때문이다. 충동을 따라도 파괴될 무엇이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앨리스의 외도나 윌리엄의 외도는 '결코 진지하지 않다.' 앨리스의 외도는 그저 '꿈'이었을 뿐이고, 윌리엄이 참석한 사교 모임은 그저 '게임, 일부러 그렇게 한 것뿐'이기 때문이다. 앨리스도 그것을 알고 남편인 윌리엄에게 '이야기를 했던 것'이고, 윌리엄도 그 모임의 참석자였다는 지인의 말을 듣고 집으로 아무일 없이 돌아갔을 뿐이다. 

그런데 문제는 그 '내부'이다. 앨리스처럼 직접 '충동'을 느낀 사람이든, 윌리엄처럼 그러한 충동에 자신을 '동일시'한 사람이든, 그러한 '충동'이 존재한다는 것이 문제다. 그래서 윌리엄이 지인의 집에서 돌아와 가면을 보고 운다. 그 가면이 앨리스의 옆에 놓여있었고, 앨리스는 자고 있었으므로 그 가면을 보지 못했기 때문이다. 앨리스라는 존재는 윌리엄에게 있어서 하나의 '질서'다. 부부, 가정이라는 질서. 그리고 그 가면은 그러한 질서를 파괴할 만한 자신의 '잠재된 충동'을 의미한다. 

또한 이 가면이 놓인 침대의 장면은 또 하나의 은유를 살필 수 있는데, 윌리엄의 '가면'을 충동의 은유라 한다면, 자고 있는 앨리스는 '꿈'이 그 역할을 한다고 볼 수 있다. 즉, 윌리엄-가면, 앨리스-꿈이라는 도식으로 정리되는데, 그러한 충동이 가지는 '무서움' 때문에 앨리스는 이미 한번 울었고, 윌리엄은 이번에야 울게 되는 것이다. 

크리스마스 당일 딸아이의 선물을 사기 위해 선물가게에서, 그들은 '충동'에서 '현실'로 다시 '돌아온다'. 그리고 나누는 대화에서는 서로의 충동이 각각 '꿈'과 '가면'으로 외화, 즉 '다른 것'이되고, 그것은 그저 하나의 경험으로, 기억으로, 교훈으로 남는다. 하지만 윌리엄과는 달리 앨리스는 '영원히'라는 말이 '무섭다'고 말한다. '잠들어 있을 때', 혹은 '해군 장교' 같은 사람이 또 등장한다면 자신의 충동은 되살아 날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러한 촉발은 다시 윌리엄으로 하여금 '가면을 쓰게 만들 것'이므로. 

결과적으로 '현실 바깥에 있는 듯한 무엇', 그리고 그곳으로 가버리려고 하는 '충동'에 대한 대처법을 그들은 생각하게 된다. 

앨리스 : ... 하지만 당신을 사랑해요. 그리고 말이에요. 최대한 빨리 해야 할 중요한 일이 있어요. 
윌리엄 : 그게 뭐지? 
앨리스 : 섹스(fuck). 

물론 이후에 이들이 하게 될 '섹스'는 결코 이전과는 다른 무엇이다. 이후의 그들의 섹스는, 충동, 그리고 충동을 촉발시킬 대상 때문에 앞으로 '무너져 버릴지도 모르는 현실'을 계속 접합하기 위한 '연속적인 임시방편'이기 때문이다. 



'A;ssertion' 카테고리의 다른 글

윤리, 그래서 당신은  (0) 2010.07.21
  (0) 2010.07.19
Evil  (0) 2010.06.30
욕망의 대상은 없다  (0) 2010.06.25
Pierre MOLINIER : 사드적 페티쉬즘  (0) 2010.06.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