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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Lacan + α

루디네스코, <쟈크 라깡> 1권, p.163 고찰


후설 설명 부분. 
뭐 이렇게 어렵게 썼다냐... 
좀 쉽게 쓰면 덧나나...

그래서 연습삼아 코멘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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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단 후설의 현상학은 데카르트의 코기토에서 시작한다. 
'코기토'의 단계, 즉, 아직 코기토의 단계에서 유일하게 존재하는 것은 '자아(생각하는 나)'일 뿐이다. 
다시말하면, 아직 세계는 존재하지 않는다. (논리적으로)
그러므로 이 자아는 완전 절대적이다. 
이렇게 인간이 개인적으로 생각하기에 모든 지각이나 사고나, 지식을 버리고, 이 코기토로 환원하는 것은 중요한 의미를 갖는데, 
이렇게 중요한 의미를 갖는 것을 뭐라고 지칭은 해야 하니까, 다시 돌아간다는 의미에서 '환원'이라고 부르고, 
다시말해 '현상학적 환원'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이렇게 환원하면 모든 세계를 초월한 하나의 '자아'를, 그 자아가 있음을 깨닫는데, 이는 일종의 세계를 구성할 수 있는 거대한 세계 의식이 되는 셈이다. 
만약 이 자아가 일정한 방향성, 즉 뭔가를 생각하거나, 그러한 방향으로 생각하거나, 그것을 하려고 하면, 세계가 움직이는 것과 같은 규모의 움직임이 된다. 

이런 상황에서 자아가 자신을 제외한 다른 존재를 인식하면 그 존재가 '생겨난다'. 
무려 세계 의식인 '자아'가 그것이 '있다고 믿는다면' 그것이 존재하게 되는 것이다. 
눈을 감으면 안보이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사라지는 것'이다. 
즉, 무엇의 존재를 이처럼 '자아'로 설명하므로, 현상학적인 존재론은 '자아론(egologie)'이 된다. 

이러한 자아는 분명, 다른 '자아'를 경험하게 되는데, 
자아는 이미 초월적인 단계에서 있는 것이므로, 
자아 간의 관계는, 초월적 상호관계라고 할 수 있고, 
그러한 관계는 초월적인 상호주체성을 갖는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이러한 '다른 자아'를 산출하는 것은 일련의 과정을 통해, 
경험을 통해 생성되는 것이고, 
이런 경험이 있은 후에야 '타자'라던가 '분신'이라던가 하는 개념을 갖게 된다. 

인간과 인간 간의 관계를 '초월적인 상호주체성'으로 규정하게 되면, 
자아가 자아를 만나는 경험을 하게 된다. 
그런데 이러한 자아는 '현상학적 환원'을 하지 않으면 개인에게 결코 생생되지 않는다. 

* 여기서 보자면 후설이 개인의 주체성이나 경험을 얼마나 중요하게 여겼는지 알 수 있다. 
데카르트의 대륙적 합리주의 전통에서 '주체'를 구하고, 
타인과의 관계는 영국적 경험주의 전통에서 '경험'으로 설명하는 과정은 꽤나 재밌다. 
사실 '나'는 원래 있고, 그 나는 '경험'을 통해 타인을 만난다고 보는 것이 합리적이기는 하다. 

* 또 후설이 여기서 염두하는 것은, 
자아의 초월적 위치가 갖는 인간성의 경향과, 
그러한 인간이 뭔가를 사고하여 깨닫게되는 여지를 남겼다는 것이다. 
후설이 보기에 '사고하는 인간'이 먼저 있다. 세상보다도 말이다. 
세상 가운데 인간이 나온것이 아니라, 
인간이 세상을 낳은 것이다. 

후설의 책 <<유럽 학문들의 위기와 초월적 현상학>>을 보자. 
자아가 하나만이 존재한다면, 그것은 인간 세계 전체의 흐름을 어떻게 할 수가 없다. 
데카르트적 전통에서만 보자면, 절대적인 자아는 하나밖에 없고, 
유일한 타자는 '신'밖에 없다. 그곳에 타인은 없다. 
하지만, 후설이 '초월적 상호주체성'을 인정하는 순간, 
인간은 인간과 만날 수 있는 여지가 생겨난 셈이다. 
또한 그러한 관계 자체가 세계를 초월한 자아들간의 만남이기 때문에, 
인간을 매몰시킨 현재까지의 과학에서 인간을 구할 수 있다. 
그래서 인간을 연구하는 과학이 오히려 인간을 매몰시키는 모순적 상황에서, 인간을 구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초월적 현상학은 '자아'를 비인간적인, 완전히 객관적인 과학, 즉, 과학적 형식주의에서 구한다. 
세계가 하나의 객관적인 무언가를 이루고 있고, 인간은 그 한부분이다는 생각은 
철저히 인격을 매몰시킨다. 
이로써 초월적 현상학은, 그 자체로써, 또 그것을 기반으로한 학문적 시점에서, 
인간, '자아'를 그 자체로 볼 수 있게 해준다. 

그래서 후설의 현상학은, 양차대전 사이의 비인간적 경향을 비판한다. 

이러한 후설의 인간상은, 하이데거 <<존재와 시간>>과 함께 읽혀서, 
존재의 비극적 측면
존재의 균열

이러한 후설의 현상학은 기본적으로 '현상학적으로 환원되지 않은 상황'을 암흑적인 상황으로 규정한다. 
해탈이 현재의 더러운 속세를 기반으로 하듯 말이다. 
그리고 하이데거의 '존재' 개념을 생각해보자면, 
그것은 결코 인간에게 드러나지 않은채 보이듯 안보이듯 사라지듯 드러난다. 
이것 자체는 '네거티브(negative)'하다. 
('비극적'이라는 용어가 이 negative라면 이해가 쉽다)
그리고 존재는 잘 보이지 않는데, 드러난 존재가 또한 그 존재라는 보장이 없다. 
즉, 존재라고 드러나 있는 것에 대해 어쩔 수 없이 그 이면을 전제할 수 밖에 없는데, 
이는 곧 '존재의 분열'을 의미한다. 
이런식으로 후설과 하이데거를 읽으면, 기본적으로 존재에 대해 부정적인 사고를 갖게 된다. 
이는 필연적으로 현실에 대한 비판적인, 비관적인 시각을 갖게 만든다. 

하지만 베르그송의 '생철학'은, 
기본적으로 '생명'이라는 것이 positive한 것이라는 것이다. 
이는 역으로 자아, 존재가 (분열되지 않고) 그 자체로 충만한, 완전한 무엇이라는 결론을 낳게 하며, 
그것은 positive하므로 쉼없이 약동한다. 
즉, 존재에 대한 긍정적인 측면을 강조한 셈이고, 
이는 현실이 제대로된 방향으로 갈것이라는 사고와 그에 기반한 행동양식을 낳는다. 

즉, 후설, 하이데거는 현실이 '숙명적으로 잘못 가고 있다'는 식의 생각, 
베르그송은 현실이 '결국 제대로 갈 것'이므로 오히려 비판적인 사고는 안된다는 생각을 낳게 만든다. 

문제는 이것이 당시의 진보적 지식인에게 어떠한 영향을 미쳤냐는 것이다. 
진보적인 사고는 현실에의 비판성을 우선으로 두는 듯 하지만, 
오히려 진보는 '미래의 우월성'을 믿는 사조이다. 
생철학적인 현실비판은, '원래 세상은 올바른 것으로 가야 하는데, 보수적인 사고가 이를 막는다'라는 관점에서 있다. 
즉, 현실 자체를 숙명적으로 비관적으로 보는 사고(그래서 현상학처럼 현실을 완전히 뒤집어 엎어야 한다는 사고)와는 시작점이 다른 셈이다. 

후설의 두 인간형, 
즉 환원한 자아나 숙명적으로 환원하지 못하는 인간을 설정한다면, 
개인이 이러한 관점에서 세계를 인식하는 것, 세계에서 행동하는 것은 두가지 길이 생겨나는 셈이다. 
하나는, 적극적으로 존재의 근원으로 회귀(초월적인 자아)하는 것이나, 
아니면 이러한 초월적인 자아로 가는 것이 불가능한 자신을 인정하는 것, 
즉 하이데거적인 존재 개념에 기초한 인간을 인정하는 것, 즉 '허무'적인 방식으로 살아가는 것, 
이렇게 두가지가 생겨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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